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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제주도의 이중계약서와 한국이 남긴 선례

글: 이현승
더 코리아 시그널(The Korea Signal) 정책 및 대외협력 이사

지난 6월, 제주도지사가 신장투석기, 감귤 묘목, 방제약 등 약 1억 6천만 원(약 10만 5천 달러) 상당의 물품을 북한에 보낸 사실이 공개됐다. 당시 제주도는 신장투석기 대북 지원 사건을 알려지자, 방어 논리로 내세운것이 “물품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점이었다. 또한 식품과 대부분의 의료 장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금지 품목에 해당하지 않고, 통일부도 사전에 승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와 북한 거래의 진짜 위험 요인은 물품이 아니라 협상 상대, 즉 미국 재무부가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정찰총국 공작원 리호남이 베이징에서 한국 관리들과 거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후 드러난 사실은 이 사안의 성격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았다.

TV조선 탐사보도팀이 입수한 계약서는 두 종류다. 내용은 완전히 동일하지만, 계약 당사자로 누가 이름을 올리고 있는지가 다르다. 하나는 실제 관련자 네 곳을 모두 명시한 계약서다. 북한 조선장애자후원회사, 중국 단동 소재 중국 무역회사, 제주특별자치도, 그리고 남북경제인연합회. 다른 하나에서는 제주도와 남북경제인연합회가 통째로 빠진다. 북한 측 회사와 중국 회사, 단 두 곳만 계약 당사자로 남는다. 두 문서 모두 서명 날짜도, 서명자가 누구인지도 적혀 있지 않다. 보도에 따르면 리호남 측이 북한 당국에 제출한 것은 바로 이 ‘세탁된’ 두 번째 버전이었다. 그래야 북한 내부 기록상으로는 이것이 한국의 지원이 아니라 중국의 지원으로 남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두 버전을 다 받아보고도 물품 반출과 북한 주민 접촉을 모두 승인했다.

이 대목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두 적대적 국가’ 노선을 내세운 이후 남한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그런데도 제주도는 지원을 강행하고 싶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바로 이 구조다. 정작 그 지원을 받아들이는 쪽인 평양이 서류 어디에서도 ‘한국’이라는 이름을 보지 못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이건 번역상의 실수도 아니고, 행정 편의를 위한 눈속임도 아니다. 거래의 실제 출처를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허위 기록이다. 통일부는 이를 2019년부터 이어져 온 ‘3자 합의’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같은 보도에 등장하는 정부 관계자조차 “왜 이중 계약서를 작성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다소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인정했다. 선례라고 부를 만큼 관행화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그 이유를 정부 스스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 이건 단순한 절차상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완곡한 표현일 뿐이다.

세계가 이미 이름 붙여놓은 수법

국제사회와 각국 정부는 지난 10년 가까이 북한의 다른 파트너들이 이런 수법을 쓸 때마다 이를 낱낱이 기록해왔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이것을 ‘편의상의 조치’라고 부른 적이 없다.

2016년 미국 법무부는 중국 무역회사 단둥훙샹(丹東鴻祥)과 그 경영진 네 명을 기소했다. 이들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부터 홍콩, 영국 웨일스에 이르기까지 20개가 넘는 유령회사를 세워, 제재 대상인 북한 은행을 대신해 달러 거래를 진행하면서 서구 금융기관이 보게 될 서류에는 그 은행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재무부는 이 회사의 계좌를 동결하고 경영진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미 정부는 이들이 “기만, 술수, 계략,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거래 상대의 실체를 숨겼다고 규정했다. 업종과 금액을 걷어내고 보면, 이 수법의 뼈대는 TV조선이 이번에 밝혀낸 제주도 계약서의 구조와 동일하다. 속여야 할 상대방을 위한 ‘가짜 버전의 현실’을 만들고, 진짜 버전은 내부용으로 따로 보관하는 것.

미국이 압류한 북한 선박 ‘와이즈 어니스트(Wise Honest)‘호의 2019년 사례는 더 정확히 겹치는 사례다. 여기서 쓰인 수단이 정확히 같은 종류, 즉 위조된 원산지증명서 이기 때문이다. 이 북한 석탄 운반선이 인도네시아 해역에서 나포됐을 때, 현지 법원은 화물 브로커가 러시아산이라고 주장하는 원산지 증명서를 제시하자 결국 화물을 그에게 넘겨줬다. 유엔 대북제재 감시단은 이 결정이 자신들의 조사 결과와 안보리 결의를 정면으로 거스른다고 규탄했다. 그 서류가 하는 일은 딱 하나였다.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쪽에게 “이 물건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곳에서 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제주도의 두 번째 계약서가 하는 일도 방향만 반대일 뿐 완전히 똑같다. 외부 감시자에게 “이건 북한산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가짜 증명서 대신, 평양을 향해 “이건 한국이 보낸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가짜 계약서인 셈이다. 방향은 반대지만 논리는 하나다.

다자 제재 체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식의 서류 겹치기가 파고들 틈을 없애기 위해서다. 여러 나라 정부와 은행들이 한데 모여 정확히 이런 패턴, 즉 서류 간의 불일치, 사라진 중개자, 그리고 정작 감시를 받아야 할 당사자가 가장 멀리 퍼지는 버전의 기록에서는 조용히 자취를 감추는 거래를 찾아내기로 합의한 체제다. 특히 3자 제재, 이른바 세컨더리 제재 권한은 바로 이런 경우, 즉 물품 자체는 합법일지 몰라도 그 주변의 거래 구조가 실제 관련자를 숨기도록 설계된 경우를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것은 가정이 아니다. 통일부의 결재 서류까지 남아 있는 채로, 한국의 한 광역자치단체장이 방금 저지른 일이 바로 이것이다.

제주도의 반론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두가지 이유

공정을 기하려면 제주도 쪽에서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반론도 짚어야 하고, 그 반론이 아주 근거 없는 것도 아니다. 신장투석기와 감귤 묘목은 원심분리기 부품이 아니다. 이번 보도 내용 어디에도 이 지원이 핵무기 프로그램과 연결됐다는 증거는 없다. 남북 인도적 교류는 한국 국내법상 엄연한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고, 광역자치단체가 이런 채널을 운영한 전례도 있으며, 통일부 역시 사후 승인이 아니라 사전 승인을 거쳤다. 이번 이중계약을 국제 감시망을 속이기 위한 은폐가 아니라, 북한의 정치적 입장에 맞춘 좁은 의미의 타협, 즉 워싱턴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양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남북 관계에서 종종 써온 일종의 ‘외교적 배려’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이 ‘외교적 배려’라는 해석은 유엔 승인 절차를 확인하는 순간 무너진다. 대북 반출 물품, 특히 의료기기류는 원칙적으로 1718 위원회(대북제재위)의 인도적 가이드라인에 따른 사전 검토 대상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통일부의 국내 법적 승인뿐이며, 이 거래가 1718위원회에 별도로 통보되거나 예외 승인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한국 정부가 유엔에 사전 통보 없이 대북 지원을 진행한 전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8년에도 한국은 북한에 약 343톤의 석유 제품을 보내면서 대북제재위원회에 사전 통보하지 않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논란이 된 바 있다. 선의의 관행이라면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 거래는 북한을 향해서도, 국제사회를 향해서도 똑같이 기록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또 다른 문제는 이 물품들이 북한으로 유입된 채널과 과정이다. 상대는 이름 없는 북한의 복지 관련 실무자가 아니었다. 30년 가까이 대남 공작 채널을 운영해온, 미 재무부가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북한 정보기관 요원이었고, 같은 보도에 따르면 이번에 보낼 구체적인 품목까지 그가 직접 요청했다고 한다. 지원 방식을 부드럽게 포장하기로 선의로 결정하는 것과, 그 지원을 제재 대상 공작원을 통해 전달하면서 그의 요청에 따라 정부 스스로의 관여 사실까지 지워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함께 놓고 보면, 이 사안은 어색한 외교 관행 수준을 넘어, 세컨더리 제재법이 정확히 겨냥하는 그 사안, 즉 제재 대상자가 거래 조건을 지시하고 제3자가 그 거래를 은폐하는 구조로 넘어가게 된다.

이 지점에서 이중계약의 성격은 분명해진다. 이 문서는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첫째는 북한 당국을 향한 것으로, 지원의 남한 출처를 감춰 북한의 대남 정책과의 모순을 회피하는 기능이다. 둘째는 국제사회를 향한 것으로, 만약 이 거래가 사후에 유엔이나 미국의 조사 대상이 될 경우 북한 측에 제출된 계약서는 이미 “중국의 지원”으로 기록을 남긴 상태가 된다. 즉 북한을 속이기 위해 만든 문서가 동시에 국제 감시 체계를 향한 잠재적 위장 자료로도 기능하는 것이다. 이는 부수적 효과가 아니라 구조 자체의 성격이며, 이 사안이 단순한 외교적 배려가 아니라 제재 회피의 성격이 짙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근거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바로 이런 식의 서류 겹치기를 추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자 제재 감시 체제 —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유엔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패널이 2024년 4월말 사라진 지금, 그 감시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다국적 제재 모니터링 팀(MSMT)이 서울 측에 이번 거래의 완전하고 무삭제된 기록을 요청해야 한다. 두 버전의 계약서, 선적 및 통관 서류, 그리고 실제 인도 여부에 대한 확인 자료까지 모두 포함해서다. 제주도는 자국 국회에조차 이런 자료 공개를 거부해 온 상태다. 동맹국 정부의 지원 사업 내부에서 이중계약 구조가 드러난 이번 사건이야말로, 이 수법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참고 사례로서 감시 체제가 반드시 기록해둬야 할 일이다.

둘째, 워싱턴은 이 사안을 양자관계의 각주 정도로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오는 9월 한국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 참석할 때, 미국 대표단은 남북 교류 일반에 대한 원론적인 질의가 아니라, 이중계약이라는 구체적 메커니즘을 콕 집어 이 사안을 직접 제기해야 한다. 통일부 스스로 승인한 거래에 왜 두 가지 버전의 진실이 필요했는지, 서울 측의 공식적인 설명을 요구해야 한다.

셋째,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은 오영훈 제주지사 개인의 제재 노출 여부에 대한 검토를 즉각 시작해야 한다. 그는 미국이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인물과 직접 만나 지원 사업을 협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결과물인 이번 지원 사업에서는 북한 당국에 제출된 계약서에서 한국 측의 관여 사실이 삭제됐다. 이 두 사실만으로 오 지사 개인이 미국의 제재 기준을 충족한다고 미리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OFAC이 거래의 전 과정과 이중계약서 작성 경위, 리호남의 역할을 조사할 충분한 이유는 된다. 그 검토를 통해 단순한 업무상 판단을 넘어 고의적인 제재 회피 조력 정황이 확인된다면, 개인 제재를 포함해 미국법이 허용하는 조치를 검토하는 것은 OFAC이 내려야 할 판단이다.

이 모든 제언이 인도적 교류 자체를 불법시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허위 서류는 어느 부처의 도장이 찍혀 있든 허위 서류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 10년간 베이징을 향해, 유령회사와 앞뒤가 안 맞는 계약서야말로 북한이 국제사회의 감시망을 빠져나가는 방식이라고 지적해왔다. 조약 동맹국이 똑같은 수법을 쓰고서, 그 의도가 무기가 아니라 원조였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중국과 러시아의 훨씬 큰 규모의 제재 위반에 대한 국제사회의 권위는, 이 규칙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해왔다. 제주도의 두 번째 계약서는 이제 그 전제가 여전히 유효한지를 시험하는 살아 있는 사례가 됐다.


더 코리아 시그널의 이현승 정책 및 대외협력 이사는 북한 탈북자이자 인권 운동가이며, 글로벌피스재단(Global Peace Foundation)에서 수석 전략가로 북한 정책, 인권, 한반도 통일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북한 청년 지도자 회의’의 창립자이며, 북한 문제 전문가로서 미국 정부와 정책계 자문 역할을 수행해 왔다. 2014년 정권의 대대적인 숙청 물결 속에서 탈북하기 전, 이현승은 북한의 해운 및 광업 분야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북한과 중국 간의 무역을 주선했으며, 조선인민군 특수부대 상사로 복무했다. 그는 유나이티드 프레스 인터내셔널(UPI), 미국의 소리 방송(VOA), 자유아시아방송(RFA)을 비롯한 여러 글로벌 언론 매체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이 씨는 중국 동북재경대학교에서 국제무역 및 경제학 학사 학위를,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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